Lagavulin 16 (700ml, 43% ABV)
세상엔 맛있는 술이 참 많은데다 또 내겐 유독 '맛없는 술'이 드문터라 선뜻 뭘 좋아한다 말하기가 어렵지만, 라가불린 16은 주저없이 꼽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술이다. 피곤할 땐 이거, 비오는 날엔 저거, 더울 땐 그거, 신나게 취하고 싶을 땐 저거... 이런 식으로 때에 따라 맛있다가 별로였다가 하는 다른 술들과 달리 라가불린 16은 항상, 어떤 상태인지에 상관없이 감탄스러웠다. 이거 이미지가 딱, 포근하고 부드럽고, 하몽과 멜론의 조합처럼 고급진 단짠단짠의 느낌이다.
쿨일라에 비하면 향에 은근히 짭쪼롬한 기운이 있다. 근데 또 바닷바람이 생각날 만큼 짜기만 한 건 아니고 달달한 향과 엉켜있어서, 킁킁대다보면 금새 기분이 느긋해진다. 한 모금 들이켜도 혀를 많이 쪼거나 시리지 않고, 부드럽게 달달하다. 매캐하게 올라오는 마지막의 훈연향도 그야말로 일품. 훈제 치즈가 떠오르는 짠내와 연기... 불 가에서 나는 나무 연기의 기운이 같이 있다. 따끈한 속과 날숨에서 느껴지는 훈연향의 여운도 포근하다. 상세히 짚어내지 못하는 내 혀가 아쉬울 정도로, 풍성하고 우아한 술이다.
삼겹살엔 소주, 스테이크엔 아일라! @해방촌 올드나이브스.
왜인지, 주위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농담인 줄로만 알던데 나는 예쁜 술이 좋다. 비슷비슷한 급이면 예쁜 걸 고르고, 맛이 그냥저냥이어도 병이 예쁘면 인상이 나아지고, 아무리 맛있어도 병이 못생겼으면 자주 안 사게 된다. 그런데 라가불린은 이 '겉멋'에서도 완벽한 술이다. 올리브 색 우아한 병의 모양이나 따뜻한 베이지 빛 라벨, 그리고 불그스레 빛나는 술의 색...도 좋아지는데 크게 한몫했다. 이 조합이 너무 좋아서, 라가불린 로고를 붉은 색으로 수놓은 올리브/베이지빛 티셔츠를 디자인해 파는 상상까지 해봤다ㅋㅋㅋㅋㅋㅋ. 심지어는 이름마저 관능적이다. 조용히 혀를 굴리다 입술을 살짝 내밀어야 부를 수 있는 라-가-불-린. 개구리가 연상되는 라프로익과는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지나치게 비싸거나 구하기 어렵지 않은 점도 좋다. 생각날 때 사 마실 수 있고, 좋아한다고 말할 때 허세스러울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ㅎㅎㅎ. 커버차지가 없는 바에서의 가격은 보통 잔당 1만원 후반에서 시작하는 것 같고, 남대문에서의 가격은 한 병에 약 12-14만원. 아무리 우아하다, 풍성하다, 예쁘다한들 나무/석탄/고무/담배 등을 태운 훈연향이 강하기 때문에 '피트충'이 아니라면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그래도, 아일라 위스키 중에선 보모어와 더불어 개중 가장 진입하기 쉬운 술인 것 같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러스티 네일 등의 칵테일에도 잘 어울린다. 종종 타박을 들으면서도 꿋꿋이, 제일 열심히 주위에 알리고 있는 술.
ㅡ덧20171123: 아래 댓글로도 달렸듯 최근 생산분은 맛이 예전만 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어우 미식가들 유난이야;'라고 생각했는데(죄송함니다...) 어제 한 바에서 맛본 라가불린 16은 정말 맛있음이 확연히 덜했다.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병이었는데, 딴 술인 줄 알았을 정도. 구입할 때 조심해야 할듯하다...
'🥂 술 > 위스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스키 - 벤로막 우드 피니시 에르미따주 (4) | 2017.11.20 |
---|---|
【 라이 위스키 】 에 관해서: MGP, LDI를 들어보셨나요? (12) | 2017.11.17 |
위스키 - 라가불린 8, 200주년 기념 에디션 (3) | 2017.08.16 |
위스키 - 쿨일라Caol Ila 12 (13) | 2017.07.25 |
위스키 - 옥토모어Octomore 7.3 (3) | 2017.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