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좋아하는 디저트는 아닌데, 가다 한 번씩 콕 집어 새콤한 레몬 파이가 먹고 싶을 때가 있다. 폭신폭신 달달하면서도, 동시에 입에 침이 고이게 새콤한 맛을 품고 있는 레몬 파이. 흔한 메뉴임에도 막상 크림이 느끼하거나 머랭이 눅진하지 않게 맛깔난 집이 드물다 보니, 그럴 땐 그냥 바에 앉아 페니실린을 시킨다. 페니실린은 레몬 파이의 새콤달콤함에 은근한 생강을 입히고, 매캐한 연기 향까지 올려 자칫 뻔할 뻔했던 맛에 재치를 더한 칵테일이다.
내가 즐겨 마시는 칵테일이 대부분 한 세기도 전에 만들어진 것들임에 비해, 페니실린은 2005년도에 만들어진 '신상' 칵테일이다. 그 덕에 유래도 아주 정확하게, 2005년도에 호주인 Sam Ross가 뉴욕의 Milk & Honey라는 유명 바에서 일하며 고안한 술이라고 전해진다. 만들어진지 이제 겨우 10년을 좀 넘겼는데, 이렇게 전 세계에 쫙 퍼졌을 뿐 아니라 클래식 칵테일 마냥 레시피도 각양각색인 걸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즐겨 마시는지 알만하다.
사과나무 칩을 태운 연기를 팡팡 입힌 페니실린. @한남동 마이너스
흠,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맛있는 레몬 머랭 파이가 은근 드문 것처럼 페니실린도 아무데서나 잘하는 칵테일은 아닌 것 같다. 이유인즉: 어디서나 맛이 같은, 말하자면 일종의 공산품인 위스키 외에 생강(시럽)과 꿀(시럽)이 들어가는데 여기에 맛과 질감이 많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다녀본 결과 꿀과 생강을 섞어서 청을 만든 후 레몬 즙을 넣는 곳도 있고, 레몬+꿀 시럽에 생강 시럽을 같이 쓰는 곳도 있고, 레몬 주스와 생강 리큐르를 쓰는 곳도 있고... 제조법이 각양각색이었다.
음, 페니실린에 한해 뭉뚱그려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가격이 맛의 지표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아무래도 상권이 저렴한 편인 곳에선 꿀, 생강청, 레몬시럽 등등을 만드는 데에 큰 공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묵직한 맛, 부드러운 질감을 잡아주지 못하고 가볍고 홀쭉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예를 들어 마티니, 맨하탄은 신촌에서도 괜찮은 술과 바텐더의 적당한 솜씨만 있다면 맛있게 마실 수 있지만, 페니실린은 그게 안 된다). 그런데 칵테일 한 잔에 2만원에 가까워지는 곳에 가면, 아무래도 베이스가 되는 위스키부터 다른데다 나무칩 연기를 입힌다든가, 벌집꿀을 올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한결 풍성한 맛과 재미를 볼 수 있다. 평소엔 연기 쏘는데 큰 감흥이 없었는데, 페니실린만큼은 그 효용이 확연했다.
조니워커 더블블랙과 아드벡을 쓰곤 벌집꿀을 올린 페니실린. @내자동 코블러
칵테일을 고안한 쌤 로쓰가 처음 제안한 레시피는 베이스로 피트향이 있는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 1(예: 페이머스 그라우스, 조니워커 블랙 등) 2 온스에 생레몬즙 3/4 온스, 꿀 시럽 3/8 온스, 생강 시럽 2을 3/8 온스 넣고 셰이킹해 유리잔에 따르고, 마지막에 피트향이 강한 아일라 위스키 3(예: 라프로익, 라가불린, 아드벡) 1/4 온스를 조심스레 동동 띄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명 칵테일 사이트들을 보면 생 생강을 빻아 쓰라는 곳도 있고, 변형이 아주 다양하다.
뭐, 내가 직접 만들 것도 아니고. 소비자인 내 입장에선 그냥 '피티한 위스키' '생강' '꿀' '레몬'만 잘 표현한다면 어떻게 만들든 만족스럽다. (아일라 위스키를 두툼히 올려) 때로는 담배/약품같고, 때로는 꾸수쌉싸름한 피트향이 레몬, 꿀의 새콤달콤함과 잘 어우러지는 첫입, 그러면서도 위스키와 레몬이 가볍고 날카롭게 찌르지 않는 도톰한 바디감, 얼음이 좀 녹은 마지막 몇 모금을 비울때에도 마냥 맥아리없지 않게, 가라앉은 생강 시럽에서 느껴지는 까슬까슬함... 꺅. 게다가 여리여리 노란 색감(봄), 새콤한 레몬맛(여름), 피트한 위스키의 낙엽같은 인상(가을), 시럽에서 오는 두툼한 바디감(겨울) 덕에 어느 계절에 마셔도 재미있는 술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술을 바꿔 데킬라와 메즈칼로 만든 Amoxicillin이라는 칵테일도 있다고 하는데, 둘다 언젠가는 뉴욕에 가서 원작자한테 마셔보고 싶다(ง ˙ω˙)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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