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켓beckett's 진을 쓴 마티니 @신천 비바라비다
바에 드나들고 술을 마시기 시작한 처음부터 달곰하고 새콤한 술은 안 좋아했다. 그냥... 스푸모니 같은 건 2만원짜리 자몽 에이드 같았고, 김렛 같은 건 한 입 마시고 내려놓으면 쳐다볼 때마다 살짝씩 침 고이게 하는 그 새콤함이 딱히... 구구절절 설명할 것 없이 그냥 직관적으로 달갑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단맛, 신맛 다 안 좋아하고 쎈 술이 좋다고 하다보면 대체로 마티니에 추천이 닿는다. 도도한 마티니 글라스와 영롱한 빛깔은 매력적이었지만, 처음 마셔본 마티니는 부담스러울 만큼 드라이하고 날카로이 쨍한 느낌 때문에 넉넉히 한 모금 꿀꺽 마시기 어려웠다. 아.. 마티니를 좋아하게 되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다. 예전엔 가끔 주위 손님이 마티니를 주문하면 와, 인생의 쓴맛을 아는 어른이구나, 하며 동경의 눈빛으로 잠시 쳐다보기도 했었ㄷㅏ. ㅎㅎㅎㅎㅎㅎ.
그런 마티니를 찾게 된 건 온갖 '맛'에 피로를 느끼면서부터다. 대학원 졸업 즈음엔 일과를 마치고 자정 넘어 동네 바에 잠깐씩 들르곤 했는데 온종일 먹는 게 학식, 외식, 과자이다 보니 집 바깥 먹거리 특유의 자극적인 맛에 피로가 쌓여 어떤 '맛'을 또 보고 싶지가 않았다. 최대한 담백, 단순한 맛의 술을 흘려 넣고 천천히 그 심심한 맛을 음미하고 싶었다. 일단 마티니는 기대한 대로 노골적인 과일 맛이나 단맛이 없어서 좋았다. 다만 생각보다 술이 쎄고 강렬해서 그 맛을 뜯어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잔에 뿌린 레몬 껍질 즙의 향이 인공적이지 않아 상쾌했고, 술을 입에 머금으면 진의 어렴풋한 풀, 솔의 향이 아른거렸다. 날카롭고 쨍한 기운은 좀 힘들었지만 어차피 열두시 넘어 방문하는 나는 시간이 얼마 없어서, 술기운이라도 오르겠지...하는 마음으로 마시다 보니 익숙해졌다.
애플 마티니, 에스프레소 마티니처럼 세상에 마티니라고 불리는 술이 참 많지만 보통 '술꾼'의 마티니는 진과 버무스로(만) 만든다. 각종 마티니와 구분하기 위해선지 '드라이' 마티니라고도 하는데, 진(gin: 주니퍼 베리와 각종 허브를 증류한 40도 이상의 술)과 버무스(vermouth: 화이트 와인에 허브 등의 향신료를 입혀 만든 강화 와인, 약 14~18도)중에서도 보통 달지 않은 런던 '드라이' 진과 '드라이' 버무스를 쓴다. 비율마저도 옛날 20세기 초엔 2:1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요새는 6:1에 가깝게 만드는 게 표준이라고 한다. 진을 스트레이트로 콸콸 따르고 버무스로 조금 양념을 했구나, 싶은 비율이니 힘들었던 게 당연하구나 싶다.
신기한 건, 같은 비율로 만드는 마티니도 어떤 진을 쓰는지, 또는 스터를 얼만큼 하는지에 따라서 맛이 많이 다르다는 거다. 맛과 향으로는 '무미'와 각종 허브/꽃/과일 향 사이에 다양한 농도가 있고, 질감으로는 찌르듯 날카로운 느낌부터 부들부들 벨벳 같은 부드러움 사이에 다양한 지점이 있다. 그중에 나는 향긋하고 부드러운 마티니가 좋다. 텡커레이 텐이랑 노아이 프라Noilly Prat 정도. 그리고 염장하지 않은 탱글탱글한 생올리브를 같이 주는 곳이 좋다. 갑자기 친구가 약속에 늦는다고 연락하거나, 꼭 먹고 싶은 음식점의 대기 예약을 걸어두고 시간을 보내려 바에 잠깐 들렀을 때, 아니면 일 끝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마시는 딱 한 잔으로 생각나는 술이다. 깔끔하고, 예쁘고, 세서 좋다.
@광화문 코블러
더티 마티니는 마티니에 올리브를 (빻아)넣어 짭짤하고 탁한 술이다. 영롱한 마티니와는 달리 그 탁한 빛깔 때문에 '더티'하다는 이름이 붙은듯한데, 올리브의 기름지고 간간한 맛 덕에 한결 마시기가 수월하다. 내가 좋아하는 칵테일 top 3에 들 만큼 마음에 드는 술. 한 가지 신기한 건... 마티니는 다 고만고만하게 진에 버무스를 비슷한 비율로 섞어서(스터) 만드는데 비해, 더티 마티니는 만드는 법이 참 각양각색이라는 점. 기주만 해도 진이 아닌 보드카를 쓰는 경우가 있고, 올리브도 생올리브를 쓰는지 통조림을 쓰는지가 가게마다 다른 데다 국물?만 넣는지, 짓이겨서 거른 후 즙만 넣는지, 짓이겨서 통째로 넣는지가 달랐다. 심지어는 스터하는지 셰이킹하는지도 바텐더마다 다르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진에 머들링한 올리브를 걸러 넣은 더티 마티니가 좋다. 더티 마티니는 아무래도 올리브 맛이 주가 되므로 서해 바닷물만큼 짜지 않은 이상 사실 방식이 이렇든 저렇든 큰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다만 보드카를 써서 셰이킹한 경우는 나름의 시원하고 깔끔한 매력이 있긴 하지만, 금방 마시지 않는 이상 온도가 올라갈수록 보드카의 거북한 알콜향이 올라온다. 다른 보드카보다는 그레이구스와의 조합이 제일 맛있었다. 그리고 염장한 올리브 통조림으로 만든 더티 마티니가 맛있었던 건 딱 한 번, 몰타르의 N 바텐더님이 만들어주셨던 잔. 되게 맛있는 칵테일인데, 이상하게 주위에 더티 마티니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바에서 이걸 시키는 사람을 본 적도 없다. 그치만 내겐 인생의 마지막 세 잔을 꼽으라면 1순위는 아닐지언정 꼭 넣고 싶은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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